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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제 맥주집 홀 서빙 알바 기록 : 술 마실……아니 배울 사람 오세요.
    토끼씨 작업실/알바 일대기 2020. 2. 24. 23:29

    맛 없는 잭다니엘

    ‘음식, 맥주, 와인 등 배울 사람 오세요’

    알바 공고 사이트에 올라와있던 그 문구가 날 따뜻하게 녹여주는 것 같았다. 집하고 도보 권이었고, 한옥 펍 인테리어가 분위기 있었고, 항상 ‘처음’과 ‘낯섦’에 긴장하는 나를 다정히 대해줄 것 같았다. 심장을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친구에게 얻은 ‘미소’라는 조언 하나 간신히 들고 면접엘 갔다.

    면접 때 반말부터 까는 곳은 믿고 거르라던데, 지원한 계기가 뭐냐는 말에는 껄렁함이 묻어있었다. ‘양아치?’라는 생각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지만, 그래도 사람은 한 번 봐선 모르는 거지 라고 낙관하며(혹은 자위하며) 지원동기를 횡설수설했다. 뒷날에야 생각한 거지만, 사장님은 내 인물 저장고에서도 아주 특색 있는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게, 두 번째 보는 날 면전에 대고 욕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1. 서빙 알바는 요일에 따라 일의 강도가 달라진다.

    독특한 유형(?)의 사장님은 일단 차치하고라도, 손님이 제일 많이 몰리는 주말과 금요일 저녁이 일의 강도가 세다. 나는 다행히 평일 담당이었지만, 평일에도 수요일과 목요일은 열 개 테이블 중 7-8개 테이블이 차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러면 대체로 사장님의 기분은 올라가고, 서버의 체력은 내려가며, 주문 실수 등의 사소한 오류와 설거지 거리의 양은 많아진다. 몸은 바쁘지만 정신은 의외로 편하고, 그날 하루 영업이 끝나면 육체노동의 뿌듯함과 고통에의 해방감마저 느낄 수 있다. 사장님의 눈치를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장사가 잘 되는 게 차라리 낫다.

     

    나에겐 늘 어려운 너, 거품을 왜 안 주니 너.

    2. 손님을 상대하는 일이 제일 수월하고, 맥주를 따르는 일이 제일 어렵다.

    새로운 사람 대하는 게 불편한 성향이었던 나로서는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발견이었다. 특색(?)있는 사장님의 영업방침대로 웃으며 서빙하고 그릇과 잔을 치우면 대개 손님들에게선 고맙다는 말이 돌아오곤 한다. 서비스를 이렇게 많이 주니 천사로 보인다는 소리라도 듣게 되면 프랜차이즈에서 서빙하지 않고 여기서 서빙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만두는 날까지, 그리고 가끔 대타를 뛰는 날도 제일 나를 괴롭히는 건 외려 맥주 탭이었다. 모양이 각기 다른 잔에 열 가지의 맥주와 거품을 용량대로 채우는 것이 무엇보다 어려웠는데, 가스의 기압을 조절하기엔 내 손이 이상한 건지 거품이 잘 안 생기거나 거품이 너무 많이 생겨 비싼 걸 다 버린다며 야단을 맞곤 했기 때문이다. 혼난 일의 5할은 아마 이 맥주 따르기였던 것 같다.

     

    3. 서빙 알바는 다재다능을 요한다.

    출근을 하면 포스와 배경음악을 켜는 것부터 테이블과 의자 닦기, 기물 핸들링, 설거지, 손님 안내, 몇 십 가지나 되는 메뉴의 주문 접수, 그릇과 식기 서빙, 화장실 비품 채우기, 잔을 칠링해 맥주를 따르는 것, 계산, 테이블 뒷정리와 설거지, 주방의 밑 재료 손질과 간단한 안주 제조 등등의 일들이 여유를 두지 않고 휘몰아 닥친다. 마치 학창시절, 각 수업 선생님들이나 교수님들이 세상엔 이 수업만 존재한다는 듯 저마다 과제며 쪽지시험을 내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4. 후폭풍은 다리로.

    7-9시간 정도, 앉을 곳 없이 내내 서있고 돌아다니다보니 새벽 1-2시쯤 퇴근할 때엔 두 다리가 부었다. 집에 들어오면 바로 쓰러지고 싶은 데도, 한 시간 씩은 다리 스트레칭을 해주어야 자면서 끙끙거리는 일이 없다. 조금이라도 피로물질이 남으면 그 다음날엔 더 피곤하게 일어나게 된다. 이건 내가 잘 붓는 체질이라 더 그런 걸 수도 있다.

     

    피나치공 쉬림프가 생각보다 맛있었지

    5. 공짜 술과 공짜 음식.

    사장님의 재량 영역. 영업시간이 끝나갈 즈음, 사장님의 기분 상 같이 마시고 싶은 기분이거나, 주변 이웃 가게의 사장님들이 방문할 때면 여지없이 듣도 보도 못한 와인과 브랜디와 위스키와 비싼 맥주와 자극적인 배달음식과 비싼 치즈를 깔아놓고 고급스런 회식이 벌어진다. 와알못이었던 나는 여기서 그만 입맛이 높아져 버린 것이다.

    식이조절 계획에 번번이 태클이 걸렸지만, 기왕 먹을 거 맛있고 비싼 걸 먹는 게 좋았지.

    왼쪽이 진짜 맛있었는데. 스페인 리오하 아르단짜...하...

     

    급여 : 최저시급~약간 높음

    복지 : 저녁밥, 술과 음식

    만족도 : ★★★☆ 3.5/5

     

    결국 사람이 남았던 일.

    그곳에서 만난 사람 중 열에 아홉은 좋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몸의 피로는 착실하게 축적되는 일이며, 관련 업종 장래 희망이 아니면 전문 지식의 폭격이 부담스럽다. 사장님이나 함께 일하는 직원의 성향에 따라 업무환경이 지옥과 천국을 오가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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