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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BO 미드 <체르노빌> 리뷰 : 보이지 않는 것의 공포(스포有)
    토끼씨 저장고/작품 저장고 2020. 2. 27. 22:02

    볼 수 없어서 더 무서운 것.

    코로나19는 붙어있는 숫자가 말하듯 19년도 12월에 중국 우한에서 처음 보고된 바이러스다. 그리고 내가 우한 폐렴이라는 단어를 처음 듣게 된 것은 해를 넘긴 2020년 1월이었다. 식당에서 친구들과 파스타와 홍합 찜을 나눠먹으면서 '중국에서 폐렴이 유행이래'라고 잠깐 언급되고 넘어갔던 화제였다. 설마 3월을 목전에 둔 지금, 더 확산될지 감소세로 돌아설지를 예상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이 될 거라곤 그때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매일 매순간 쏟아지는 보도와 정보지들에 파묻혀있다 보니 상상만으로는 이미 코로나19에 걸리고도 남은 느낌.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감염경로와 감염원이 밝혀지지 않는 현 상황에선 괜히 찜찜하고 더 무섭다. 지하철 손잡이를 잡지 않게, 되고 아예 대문 밖을 나가지 않게 되고, 소진되는 마스크를 보면서 쪼들린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북적이던 길거리는 피란민이 빠진 도시처럼 스산하다. 이럴수록 기분을 긍정적으로 환기시키자 싶어 우리 츄츄의 영상을 본다거나 예능을 챙겨보곤 해보지만 어쩐지 감정이입이 안 되는 느낌이고, 그렇다고 매번 비슷비슷하게 암울하기만한 보도를 보기는 싫고……그러다가 미드 '체르노빌'이 떠올랐다. 핫하다고 하면 괜히 보기 싫어지는 청개구리병도 지나갔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공포를 그 사람들은 어떻게 견디고 지나보냈던 건지 너무 궁금해졌다.

     

    <체르노빌>을 보기 전에 우연히 봤던 조승연 작가님의 콘텐츠. 스포 없이 배경 설명만으로 이렇게 흥미 뿜뿜이라니. 

     

    가가가각. 어쩐지 그 소리가 귓전에 맴돌 것 같은 타이틀. 다른 공포 효과음이 필요가 없다.

     

    수렁을 향한 신호탄, 핵발전소의 폭발

    체르노빌 핵발전소에서 오묘한 푸른빛이 창공으로 쏘아졌다. 디지몬 진화 장면에서나 볼 법한 비현실적이고도 아름다운 빔이었다. 이 폭발을 기점으로 달리기 경주의 신호탄처럼 사건은 빠르게,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한다. 누가 봐도 악당이구나 싶은 현장책임자 디아틀로프는 발전소 제어실에서 남 탓+꼰대력을 발휘해 직원들을 윽박지른다. 노심이 없을 리가 있어? 네가 태어났을 때 난 이미 방사능 전문가였어. 노심이 폭발했다는 너의 가설을 증명해봐! 왜 제어봉이 안 내려가는지 직접 보고와! 나도 같이 소리쳤다. 증명 같은 소리하네. 넣을 제어봉이 없다니까, 이 아저씨야. 지금 방사능 퍼졌다고?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3단계의 보고를 거치며 안일한 한 줄 감상으로 후려쳐진다. 악당은 연구소 소장과 2인자에게 화재만 진압하면 되는 수준이라고 보고하고, 악당2 소장은 3.8 뢴트겐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수치라며 이 자리 전문가는 나야 나 분위기만 잡고, 연료동력부장관 보리스는 고르바초프가 동석한 회의에서 'X-ray를 찍고 싶으면 체르노빌로'라는 유우머을 친다. (악당2가 주최했던 회의에서 어느 지팡이 짚은 악당 3.5 할아버지가 '우린 할 수 있어, 저기 레닌의 초상을 봐. 그 영광을 더럽히지 말고 어린놈은 입 닥치고 당장 체르노빌 전화선이나 끊어!' 라는 지시에 이번 회의는 성공적이었어라고 박수치는 상황이 내게도 익숙한 것은 왜 때문에. 아 눙무리......)

    환장의 보고가 멈춘 건, 3.8뢴트겐은 측정기의 최대한도일 뿐이며 노심이 노출된 상황이라고 '감히' 발언한 레가소프 교수 덕분이었다.

     

    소리 없이 옆에 앉은 절망, 부추기는 침묵과 방관

    철밥통 악당4인 줄 알았던 보리스는 의외로 문제해결에 충실한 장관이었다. 도착한 현장에서 보리스가 악당2와 3을 말발로 발라 구속시키고, 레가소프는 사고수습을 위한 방법을 백방으로 찾는다. 하지만 상황은 더없이 비참했다. 완벽한 해결책이 없어서 기껏 긁어모은 물자와 인력이 갈려나가고 있는 상황도 막막했지만, 중앙 최고위는 어떻게 해서든 우호국들과 적국인 미국에게 '소련은 아무것도 실수하지 않았다'라는 헤드라인 한 줄만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들은 모스크바의 대리석 궁에 앉아서 전화로 그 한 마디만 듣고 싶어 했다.

    상황의 비참함이 상징적으로 와 닿았던 장면이 있다. 전화를 끊은 보리스가 '독일에선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는 말을 하고, 레가소프는 아파트 창밖에 교복 무리가 평화롭게 다니는 광경을 내려다본다. 국가의 체면과 얄팍한 자존심이라는 무게 추를 만들기 위해 순진무구한 생명들부터 그 쇳물 속에 밀어 넣고 있는 것이었다. 진실이 그랬지만, 레가소프는 말할 수가 없었다. 말하는 순간 사찰단들에게 끌려가 현장에서 빠지게 되면, 그 자리를 어떤 멍청한 절망으로 채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승리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오, 레가소프 교수.'

    참담한 얼굴로, 오염수에 사람을 투입하는 작업을 허락해 달라는 레가소프에게 공산당 최고 수장은 그렇게 어물쩍 답하고 회의장을 나간다. 허락 향 첨가 3%+난 모르겠으니 너 알아서 해라 엑기스 97%=어쨌든 내 책임 아니다, 라는 수식을 연상한 건 나뿐일까.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수식이 낯설지 않은 건 나뿐일까.

     

    사람이 저지른 과오, 아니 그 찌꺼기와 치르는 전쟁.

    몇 만 명이 차출된 비장미 어린 작전은 그저 까맣고 부드러운 돌을 건물 아래로 던져 치우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그 무언가와, 아니 거기 묻은 숨결과 바람을 상대로 필사적으로 주먹질을 하고 있구나. 허무함과 한심함과 무력함과 간절함이 교차했다.

     

    '지금 당장 하겠습니다', 일주일 후엔 죽겠지만

    극 내내 레가소프 교수에게는 질문이 쏟아진다. 그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죽습니까. 그는 연구결과지를 작성하듯 객관적으로 답한다. 일주일정도 지나면 피부가 녹고 검게 변해 죽을 겁니다. 그리 많은 양에 노출 된 것은 아니지만 몇 년 후엔 암에 걸리겠죠. 바로 죽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체르노빌엔 죽음 속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자를 긁어모으고, 인력을 밀어 넣고, 헬기로 모래를 붓고, 지하수 오염을 막기 위해 벗은 몸으로 땅굴을 파고, 오염수에 몸을 담그고, 오염된 반려견들을 총살하고 묻으며 한 가닥 죄책감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닥친 죽음이라는 것이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은 얼굴인 것도 같았고, 제대로 와 닿아 모든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얼굴인 것도 같았다. 그들이 움직인 이유는 몇 만 루블의 보상이 아니라, 더 많은 죽음을 막기 위해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진실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작품의 처음과 끝, 레가소프 교수가 녹음기에 내뱉던 '거짓말의 대가는 무엇인가'라는 고요한 비명과는 대비된 희망이 그 얼굴들에 있었다. 묵묵하고 소란스럽지 않게. 히어로 레가소프와 호뮤크 박사, 그리고 악당들은 극적으로 눈에 띄었지만 그 밋밋한 얼굴들에 눈길이 더 갔다. 그들이 정말 희망을 믿고 그곳에 서있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굳은살 베긴 표정들로 늘 그랬다는 것처럼 군더더기 없이 움직였다. 어떤 누군가들은 간과하고 내팽개쳤던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물론, 결국 거의 다 죽거나 죽임을 당하지만.

     

    우리가 이용하고, 매몰되고, 땜질한 것

    왜 노심이 폭발했나. 내내 의문이었던 폭발의 진상은 악당1, 2, 3를 원고 석에 앉혀둔 재판에서 밝혀진다. (이 때 보여준 레가소프 교수의 프레젠테이션은 가히 감탄할 경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지 알 것 같은, 그런 오묘한 PT란.)기술력을 자랑하기 위해 국가는 발전소의 구조결함을 숨겼고, 악당1 디아틀로프는 그저 발전소의 가성비를 증명해 인사고과 점수를 따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들이 천하의 악당은 맞지만, 그렇다고 우리와 대단히 다른 욕망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유치하게 으스대고, 아닌 척 가리고, 가성비를 좋아하며 승진해서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싶은 건 어쩌면 인간다운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체르노빌은 무너졌다. 수많은 생명을 짓뭉개며.

     

    소소한 삶들에게 다정한 작품

    극적 만듦새나 연출의 신박함이나 소름끼치게 흥미로운 구성을 갖춘 작품은 아니었다. 마지막 화엔 자료화면과 설명을 삽입해 '이건 실화야, 그러니까 굉장히 의미가 있지 않니' 라고 의미를 주입하는 듯한 구성은 투박하고 거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의 강점이 그것을 웃돌 만큼 좋았다. 작품은 내내 생생하고 소소하고 다정했다. 대단한 척, 절체절명의 거대한 음모에 휘말려들었다는 듯 과장스럽게 날뛰지 않았다.

    다시 막막한 공포를 맞닥뜨린 소소한 우리들에게도 어떤 방법이 있을 거라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듯한 드라마였다.

     

    만족도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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